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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타주의 달빛과 진짜 보물

*카베 원연시 이후 시점


 

“요즘 떠오르는 휴양지가 있는데 말이야…!”

 

여느 때와 같은 주말 저녁, 람바드 술집은 카베의 열정적인 목소리로 들썩이고 있었다. 그는 ‘폰타인의 아름다운 해변에서 완벽한 휴양을 즐기세요.’ 라고 적힌 전단지를 책상에 펼쳐놓으며 곱게 자란 금발을 귀 뒤로 넘겼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을 둘러보았지만 모두들 반응이 심드렁했다. 

 

“응? 다들 생각 없어?”

“흠, 양이 한숨을 쉬는 장소는?”

“요새 다들 바쁘잖아. 나도 콜레이의 제 3차 교육계획을 이행하느라 정신이 없어.”

 

사이노는 엉뚱한 소리를 했고, 타이나리는 고개를 저으며 손사레를 쳤다. 알하이탐은 ‘또 시작이군.’ 같은 표정을 지으며 책에 눈을 고정한 채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 녀석은 술집까지 와서 꼭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 카베는 잔뜩 심통이 났다. 

 

“어떻게 다들 이렇게 관심이 없는 거야? 휴양지라니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아? 나 진짜 지쳤다고! 그동안 프로젝트 때문에 밤새 설계도 그리고, 클라이언트한테 치이느라 머리도 엄청 아팠단 말이야…….”

 

평소 ‘괜찮아!’를 입에 달고 사는 카베는 입에 술만 들어가면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솔직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지금이 딱 그랬다. 늘 그렇지만, 이번 의뢰는 특히 까다로왔던 모양이다. 카베의 우는 소리에 묵묵부답이던 알하이탐이 입을 열었다.  

 

“휴식이 목적이라면 집에서 쉬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나?”

 

알하이탐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카베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전단지를 알하이탐의 책 위에 던지며 빈정거렸다. 

 

“낭만이라곤 없는 자식. 집에서 쉬는 거랑 휴양지에서 쉬는 거랑 어떻게 같아? 이건 지친 나에게 주는 포상이자, 잠든 영감을 일깨울 단비같은 휴양이라고!”  

 

알하이탐은 책 위에서 전단지를 치우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낭만? 네가 전단지 하나에 낚여 사고치러 다니는 걸 낭만이라고 부른다면 난 절대

사절이야.” 

“내가 언제 사고를 쳤다 그래! 아, 설마……. 크흠, 흠…….”

 

카베는 몇 달 전, 사막에 살고 있는 불쌍하고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는 전단을 보고 무작정 사막으로 떠났다. 그 곳에서 된통 사기를 당할 뻔한 걸 알하이탐이 대신신 수습해주었었다……. 그것을 떠올린 카베는 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카베가 쑥스러워하며 헛기침을 하는 모습을 본 알하이탐은 책을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전단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타이나리가 말을 꺼냈다.

 

“아, 혹시 여기 포르타주인가? 그러고보니 이 섬 특유의 고립된 자연 생태계 때문에

희귀한 해양 생물이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 같은데…….” 

 

타이나리는 커다란 귀를 쫑긋거리며 잠시 고민하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콜레이도 데리고 현장 조사로 가는 거면 나쁘지 않겠네. 숲에서 보기 힘든 바다 생물들을 관찰할 좋은 기회고 말이야. 콜레이가 생론파에 진학할 걸 염두에 두면 좋은 견학이 되겠어. 공부는… 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겠지.”

“정말이야 타이나리? 와! 신난다!”

 

카베가 기뻐하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자 사이노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타이나리, 콜레이는 소론파에 갈 거야. 그나저나 다들 한숨쉬는 양이 사는 곳에 대한 유머는 흥미가 없는 거야? 잘 모르겠다면 알려줄게. 휴양지야. 휴 하고 한숨 쉬는 양이 사는 곳. 휴양지. 어때? 재미있지?”

“사이노…물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추워진 기분이야.”

“음, 지금 당장 물에 들어가는 건 무리지만, 바쁜 일이 정리되면 바다 수영을 하는 것도 좋을 거 같군.”

“좋아, 타이나리, 사이노도 찬성했어! 알하이탐, 다들 가는데 너는 안 간다고 할 건 아니지?”

 

사이노까지 여행에 찬성하자 신이 난 카베가 알하이탐 쪽으로 돌아보며 묻자 알하이탐은 한숨을 쉬며 책을 덮었다. 

 

“안 가.”

“왜???”

“소금과 습기에 상한 책은 복원하기가 어려워.”

“거기까지 가서도 책을 볼 생각이란 말이야?”

 

카베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학창시절에도 그랬지만 알하이탐의 책사랑은 정말 못 말릴 수준이다. 그는 밥을 먹으면서도, 운동을 하면서도 책을 볼 정도로 책 광인 수준이었다.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줄테니까. 따라오기나 해.”

“그걸 빌미로 술값을 내게 할 생각이지?”

“그야 당연하지!”

 

카베의 표정은 금새 뻔뻔하고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있었다. 

 

*

 

포르타주 해변은 햇살로 반짝이고 파도 소리는 경쾌하게 울렸다. 알록달록 예쁜 산호초들이 물 밖에서도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은 맑았고, 해변가는 물이 깎아낸 고운 모래알들로 가득했다. 곳곳에 자라난 야자수 나무도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해변에는 휴양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각자 흩어져 물놀이를 즐기거나 조개 껍데기를 주으며 즐거워했다. 카베와 그 일행들은 해변 근처에 마련된 별장에 짐을 내려놓고 물놀이에 적합한 옷으로 갈아입었었다. 해변에 도착한 카베와 사이노, 타이나리와 콜레이는 곧장 바다로 돌진했다.

 

“받아라! 수룡의 분노!” 

 

사이노가 강한 악력으로 물살을 만들어 콜레이 쪽으로 뿌렸다. 그러자 콜레이는 “으악!” 하면서 물 속으로 넘어졌다. 타이나리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콜레이를 건져내며 “적당히 좀 해.”라고 말하다 같이 파도에 휩쓸려 넘어졌다. 그 와중에 알하이탐은 파라솔 밑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게 내심 신경이 쓰였던 카베는 알하이탐 쪽을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있나?”

 

사이노는 카베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머리 위로 바닷물을 잔뜩 끼얹었고, 물놀이를 위해 틀어올린 카베의 머리는 금새 망가져 물미역이 됐다. 처음 바다에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꼴이 엉망이 된 그들은 사이노 또한 물에 담그기 위해 은밀하게 계획을을 세웠다.

 

“사이노씨 여기 좀 보세요!”

 

콜레이가 앞에서 주의를 분산시키는 동안 카베가 사이노를 뒤에서 잡았고 타이나리가 사이노를 몸으로 눌러 물 속으로 빠뜨렸다. 이제서야 사이노도 그들과 같이 비맞은 생쥐꼴이 되었고, 모두들 만족한다는 듯 웃었다.타이나리는 커다란 귀에서 물기를 털어내며 “이렇게 유치하게 노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야.”라며 솔직하게 기뻐했다. 물놀이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미 엉망이 되었으니 멈출 이유가 없었다. 이러다 다들 감기에 걸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렬한 물놀이였다. 

 

“아하하, 나 잠시만, 잠시만! 물 좀 마시고 올게!”

 

소금물을 잔뜩 먹은 탓인지 목이 탄 카베는 알하이탐이 앉아있는 파라솔 밑으로 올라왔다. 그는 알하이탐의 돗자리 옆에 놓여있는 물통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 물었다.

 

“네가 신나게 물놀이 하는 장면은 상상도 안 가지만, 그렇다고 정말 책만 읽을 줄은 몰랐어. 이럴거면 왜 따라 온거야?”

 

알하이탐이 책을 덮고 내려놓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상관 없으니 따라오라고 노래를 부르던게 누군데?’라는 눈이었다.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카베는 학창시절 알하이탐을 꼬드겨 아카데미아 뒷편 산에 있는 폭포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시절엔 큰 마찰도 설득도 필요없이 알하이탐은 이끄는 대로 따라와줬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어딜 데려가도 책만 읽는다는 건 똑같지만……. 책을 읽는 그의 시야에 얼굴을 끼워넣으면 알하이탐은 성가시다는 듯 시선을 피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알하이탐의 눈동자를 한참 동안 바라볼 수 있었다. 초록 들판에 자란 빨간 꽃이나, 저 항구 너머로 져가는 석양, 꼭 태양을 삼킨 듯한 넓은 하늘같아. 눈을 밑으로 내리면 책장을 넘기는 큰 손과 구겨진 옷자락이 보인다. 이건 불과 몇 개월 전만해도 굳이 꺼내보지 않을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었어…….’ 라고 깨달은 그 순간부터는.

 

“...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너무 오랫동안 알하이탐을 쳐다보고 말았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물을 알하이탐의 얼굴에 끼얹어버렸다. 졸지에 눈도 못 뜨고 머리가 흠뻑 젖은 알하이탐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물기를 털었다. 평소에는 가려져 있던 그의 매서운 눈썹이 드러났다.  

 

“바, 방심했지? 하하!”

 

머쓱해진 카베는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물 쪽으로 달아났다. 알하이탐은 순식간에 카베를 쫓아가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카베는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악력이 너무 강력했다. 어릴 적부터 큰 손은 커서도 변함이 없었다!

 

“알하이탐! 그러지 말고 너도 들어와서 놀지 그래?”

 

타이나리의 말에 알하이탐은 카베를 놓아주는가 싶더니 그를 바닷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혼자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카베는 그의 셔츠 자락을 꽈악 잡았고, 결국 알하이탐도 같이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카베가 알하이탐의 팔을 잡으며 일어서려다 미끄러져 그의 품에 안겼다. 젖은 셔츠가 몸에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콜록, 컥,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카베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더니 허둥대며 물러났다.

 

“균형을 못 잡은 건 너야.”

 

알하이탐은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다시 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카베 괜찮아?”

“아, 응…….”

“얼굴이 창백한데, 수건으로 몸 좀 닦고 좀 쉬다가 오는 게 어때?”

“그래, 우리도 이제 물놀이는 그만하자.”

 

카베와 일행들은 뭍으로 올라와 파라솔 밑에 놓인 비치타올로 몸 구석구석을 닦았다. 알하이탐은 그 사이 몸을 어떻게 말린 모양인지 멀쩡한 얼굴로 파라솔 밑에 앉아 아까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있었다. 어쩐지 표정이 굳은 것 같았다. 

 

‘저 녀석… 기분 나빴던 걸까……. 하지만 자기도 날 물에다 쳐박았으니 똑같은 거 아닌가? 피장파장이라고 치면 될 것을!’

 

카베는 차마 자기 속마음을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비치타올을 돗자리에 툭 내려놓았다.

 

그 사이, 온 몸의 물기를 다 닦아낸 사이노는 따로 들고 온 돗자리에 누워있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작살을 챙겨 바다로 뛰쳐 들어갔고, 타이나리는 이 곳에 온 원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돋보기와 채집통을 들고 콜레이와 해초가 자라난 얕은 물로 향했다. 카베는 모래 사장에서 모래성을 쌓기 시작했다. 모래알이 작고 고와 섬세한 작업을 하기 좋았다. 

 

매일 매일 설계도와 의뢰인에게 시달리다 온 휴양지에서도 성을 짓고 있다니 누군가가 보면 비꼬며 비웃을 일이었다. 하지만 카베에게 건축이란, 생계이기도 했지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취미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나무 블록을 쌓으며 끝없이 몰두했던 경험이 이 모래 사장 위에서도 이어졌다. 블록을 이용해 훌륭한 성을 다 짓고 나면, 카베는 거실에 모여 있는 엄마와 아빠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것 좀 봐!” 

 

카베의 금발이 햇살에 반짝이며 바람에 흩날렸다. 

 

“짜잔~ 어때? 묘론파의 별이 만든 걸작이?”

“파도 한 번이면 끝장날 걸작이로군.” 

 

알하이탐이 비꼬며 책장을 넘기자 카베는 발끈하며 알하이탐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내심 다시 원래대로 분위기가 돌아온 것 같아 안심하기도 했다.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도 존재하는 거야. 이게 파도에 쓸려나간다고 해도, 그 의미는 쉽게 퇴색되지 않는다고! 건축도 마찬가지야. 거시적으로 봤을 땐 내가 세운 건축물들도 언젠간 쓰러지고, 무너지겠지만… 어?”

 

카베의 말에 알하이탐이 다시 한 번 말꼬리를 잡으려는 순간 카베는 말을 멈추고 빠른 속도로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베의 손에 들려있는 건 녹슨 자물쇠가 달린 작은 상자였다.

 

“이 상자… 좋은 소재는 아니지만 새겨진 문양이 꽤 섬세하네. 아마 뛰어난 장인의 작품일거야.”

 

카베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상자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자, 물에서 작살을 던지며 물고기를 잡던 사이노가 불쑥 나타나 말을 걸었다.

 

“그거, 옛 무역선의 유물일지도 모르겠군.”

“봤지? 내 예술이 보물을 불렀어!”

 

카베가 자랑스레 웃었다. 알하이탐은 한숨을 쉬며 일어서더니 카베 옆에 쪼그려 앉았다. 카베는 상자를 이리저리 흔들며 달콤한 상상에 잠겼다. 안에 엄청난 보물이 들어가있거나, 보물지도라도 들어가 있으면 어떡하지? 아아 이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알하이탐은 카베가 망상에 빠져 중얼거리는 동안 상자를 슥 빼앗아가더니 꽤나 골몰하는 표정으로 상자를 들여다 보았다. 

 

“글쎄, 100번 속이면 100번 다 속는 남자의 통한의 눈물?”

“뭐어? 그런 소리나 할 거면 이리 내!”

 

카베가 알하이탐의 손에 들린 상자를 빼앗으려고 애쓰는 사이, 사이노는 그 싸움에 아랑곳하지도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수백 년 전 대부호의 배가 이 근처에서 침몰한 적이 있다고 해. 그 선적에 실렸던 보물의 전설이 아직까지도 전해지고 있지. 이 보물의 전설은…….”

“그 전설의 출처가 얼마 전에 읽은 라이트노벨은 아니겠지?”

 

마침 나타난 타이나리의 채집통에는 신기하게 생긴 조개껍데기와 해초 샘플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뒤를 따라온 콜레이도 주머니가 두둑했다. 만족스러운 채집이었는지, 타이나리의 표정은 함부로 버섯을 주워먹는 학자를 나무라는 듯 엄했지만, 꼬리는 천천히 흔들거리고 있었다.

 

“에이, 그럼 다 가짜란 말이야?”

“포르타주는 휴양지로 개발되기 이전엔 그냥 작은 섬이었으니까. 그게 난파된 무역선의 유물이라는 추측도 영 틀린 말은 아닐 거야. 물론, 단순히 최근에 휴양지에 놀러왔던 사람이 잃어버린 상자일수도 있지만 말이야.”

“뭔가 김이 새는 걸…….”

 

카베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어느덧 해도 져가고 있었다. 폰타인은 수메르보다 해가 짧다더니 정말이었다. 갑자기 차가워진 바닷바람에 으슬으슬 몸을 떨기 시작한 콜레이를 위해 사이노는 담요를 건네주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볼까?”

 

별장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카베는 어느새 알하이탐이 다시 모래 위에 올려둔 상자를 몰래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래! 이게 휴양의 맛이지!”

 

휴양지까지 와서 술을 빼놓을 수 없었다. 이 와인은 카베가 몬드 출신의 의뢰인에게서 고마움의 표시로 받은 것이었다. 몬드의 특산품인 다운 와이너리 와인이었다. 물론 오랜 물놀이에 지쳐 무얼 마셔도 달콤하게 느껴질 때긴 했다. 식탁에는 폰타인의 명물이라 할 수 있는 화려한 양식 요리와 사이노가 잡아온 특이하게 생긴 생선의 구이가 같이 올라왔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걸까요……?”

“편식하면 안돼. 콜레이.”

“네에…….”

 

잔뜩 기가 죽은 콜레이는 눈을 꼭 감고 생선 구이를 입 속에 넣었다. 입 안에 퍼지는 오묘한 이 맛이 이국의 맛인지, 먹어선 안 될 무언가를 삼킨 맛인지 콜레이는 영 알 수가 없었다. 

 

“타이나리,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할 건 없잖아? 그냥 즐기자고!”

“균형잡힌 영양 섭취는 언제 강조해도 이상하지 않아. 카베! 너도 과일만 골라 먹지 말고!”

“알았어! 알았다구!”

 

자신보다 머리 한 통이나 작은 친구에게 호통을 들은 카베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은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그 옆에서 타이나리의 제자 콜레이는 군소리도 못하고 음식을 골고루 접시로 담아오고 있었다.

 

이어지는 사이노의 이상한 농담과, 카베의 웃음 소리와, 타이나리의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한숨 소리, 콜레이의 쭈뼛거리는 소리가 한데 어우려져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한바탕 술자리가 끝나자 소등을 하고 다들 맨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이 별장에는 침대가 하나 뿐이라 그 자리를 콜레이에게 내어주는데 아무도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으으…그건 못 먹는 버섯이야….”

 

시간이 조금 지나자 타이나리가 잠꼬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꿈 속에서도 숲에 들어온 몰지각한 학자들을 상대하는 모양이었다. 사이노는 그런 타이나리의 옆에 앉아 작살을 손에 쥔 채로 잠들어 있었다. 사이노는 어릴 적부터 잘 때에도 보초를 서던 것이 버릇이 되어 이게 더 편하다고 설명했지만, 카베는 영 볼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눕기는 했지만 눈은 뜨고 있었다. 별장의 높은 천장에 매달린 전등을 빤히 바라보며 아카데미아 시절 배웠던 폰타인의 실내 인테리어 양식 따위를 생각했다. 그럼에도 잠이 오지 않자 뒤척거리던 카베는 해변에서 가져온 그 상자를 꺼내들었다.

 

“어…?”

 

마침 상자의 표면이 묘한 빛깔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무어라 글자가 적힌 것 같기도 했다. 창가로 드는 달빛을 손으로 가리자 상자 표면의 빛이 더 강해졌다. 형광 안료인가? 호기심이 동한 카베는 자리에 앉아 글자를 읽어보려 애를 썼다. 상자에 적힌 문자는 언뜻 폰타인 문자 같아 보였지만 도저히 해석이 되질 않았다. 옆으로 눈을 돌리자 카베의 시선에 잠든 알하이탐이 걸렸다. 언어에 대한 조언이라면 알하이탐에게 구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미동도 없이 곤히 잠든 그의 모습에 차마 깨우기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하지만 너무 궁금한데…! 그냥 살짝 조용히 불러보고 대답이 없으면 그냥 자기로 결심한 카베는 알하이탐을 향해 돌아누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하이탐… 자?”

“왜”

“악! 읍!”

 

때마침 입을 연 알하이탐에 카베는 깜짝 놀라 모두를 깨울 뻔 했다. 겨우 본인의 입을 틀어막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목을 가다듬은 카베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어!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깜짝 놀랐잖아!”

“본인이 불러놓고 그런 반응이라니.”

“아무튼 너 깬 거지? 깼으면 이것 좀 봐. 이거… 어떻게 읽는 거야?”

 

카베는 알하이탐 쪽으로 몸을 낮추어 상자를 그의 눈 앞으로 가져갔다. 별장이 너무 조용한 탓에 밖에서 풀벌레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모두가 잠든 사이 둘만 깨어나 대화를 나누는 건 함께 논문을 쓰던 아카데미아 시절에도 종종 있던 일이었다. 그 익숙한 일이 이제와서는 괜히 간지럽게 느껴져 카베는 뒷목을 긁었다. 알하이탐은 상자에 적힌 문구를 스윽 눈으로 훑더니 말했다.

 

“글쎄.”

“네가 해석 못하는 언어도 있어?”

“이건 언어라기보단, 암호야. 규칙성만 찾으면 읽을 수야 있겠지만 난 이런 쓸데없는 짓에 시간 낭비를 하는 것보다 잠이나 마저 자고 싶군.”

“쓸데 없는 짓이라니! 이 상자를 열 수 있는 단서일지도 모르는데.”

“암호 해독이라면 묘론파에서도 다루지 않나? 정 하고 싶다면 네가 해보는 게 어때.”

 

카베는 손을 턱 위에 올리고는 “못할 것도 없지만…….”하고 말꼬리를 줄였다. 상자가 발이 달려 어딘가로 도망가지 않고서야, 암호를 풀 시간은 넉넉하다. 그냥 다음 번에 책이라도 뒤져보며 혼자 암호를 해독하는 편이 나을까? 그냥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지론파한테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거면서! 그렇게 입술을 삐쭉이며 속으로 불평하던 카베의 귀에 알하이탐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닿았다.

 

“좋아해.”

 

카베는 심장이 쿵쾅거려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갑자기? 여기서??? 친구들 다 자는데 여기서??? 아니 잠시만, 잠시만. 그게 문제가 아니지. 그 알하이탐이??? 좋아해라고 말했다고??? 그 때 알하이탐이 천천히 다가왔다. 카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만, 잠시만 이거 무슨 전개야? 거짓말이지?

 

“거짓말…!”

“영원히 달빛 아래에서 맹세할게……. 라고 적혀있네.”

 

…뭐? 카베는 맥이 탁 풀려버렸다.

 

“어?응?어…아! 이 상자는 그러니까… 연인끼리 주고 받은 선물인 거 같네… 뭔가 사연이 있나봐. 이런 말을 굳이 상자에 적어놓다니… 꽤 낭만적이다. 주인을 찾아주어야 하려나…….”

 

카베가 크게 당황한 얼굴로 횡설수설하며 중얼거리자 알하이탐은 자기 발께에 놓인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리더니 다시 돌아누웠다.

 

“답변이 됐다면 이만 자.”

“그, 그래…….”

 

카베는 어쩐지 화끈거려오는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알하이탐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잘 수 있을리가 없었다.

 

*

 

다음 날 카베는 퀭한 얼굴로 눈을 떴다. 별장의 큰 통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안 뜰 수가 없었다. 성실한 타이나리는 이미 진작에 짐을 다 싸고 콜레이의 이부자리까지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 곧 나가야 해.”

“응……. 근데, 알하이탐은?”

 

부스스하게 머리가 다 뒤집힌 상태로 일어난 카베는 옆 자리에 알하이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글쎄, 내가 일어났을 땐 이미 옷을 다 입고 문 앞에 서있었어. 잠깐 나갔다 오겠다더니 아직 오지 않았네.”

“...”

“무슨 일 있었어?”

“응? 아니, 아니……. 그냥 또 뭐 혼자서 근처에 있는 유적이나 도서관 따위를 찾아간 거 아니겠어? 하하하, 알아서 시간 맞춰 돌아오겠지 뭐.”

 

카베는 입으로는 웃는 소리를 냈지만 사실은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알하이탐은 파산한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어린 시절 한 번 크게 갈라섰던 나를, 자신의 집에서 살아가게 해줬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또 그는 아버지의 일까지 조사해 알려주었다. 알하이탐과의 삶은 어머니가 일기장에 남겨주신 ‘동반’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알하이탐도 내 마음과 비슷할 거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 착각을 했지? 너무 바보 같았다.

 

“맞아. 돌아올거야. 기다려보자.”

“응…….”

 

카베는 평소처럼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냐며 툴툴거지도 못하고 힘없이 짐을 챙겼다. 그 짐 속에는 어제 알하이탐이 암호를 알아낸 상자도 있었다. 이건 어떻게 할까? 누군가의 사랑이 담긴 추억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이상, 그냥 가져가는 것도, 여기에 버려두는 것도 영 내키지가 않았다.

 

“이제 다들 나가는 거에요? 조금 더 있다가도 좋은데.”

 

친절해보이는 별장의 주인이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완벽히 현지인 말투를 구사하는 그녀를 보며 카베는 번뜩 좋은 생각이 미쳐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이 상자…….”

 

카베가 상자를 내밀자 주인은 상자를 덥썩 받아들더니 반갑고도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별장에서 보관해주실 수 있을까요? 모래 사장에서 주웠는데, 뭔가 누군가의 소중한 물건 같아서요. 중요한 물건이니까 곧 찾으러 오지 않을까요?”

 

주인은 카베의 이야기를 듣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카베는 주인의 반응에 어리둥절해져서 뭘 어쩌지도 못하고 주인이 웃음을 그치길 기다렸다.

 

“소중한 상자라니, 뭐, 어떻게 보면 맞긴 하죠. 제 아들이 어릴 적에 잃어버린 장난감 상자거든요. 이게 거기에 있었구나…….”

“네? 아, 하지만 상자의 무늬나 조형이 꽤 전문가가 만든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이 별장을 디자인한 애 아빠가 만든 거니까요. 꽤나 잘 나가는 디자이너였어요.”

“그럼… 상자에 적힌 문구는요…? 좋아해, 달빛 아래 맹세할게…….는 장난감 상자에 적히기엔 너무… 로맨틱하지 않나요?”

 

그 말에 주인은 다시 웃기 시작하더니 그 말을 누가 해줬냐며 물었다. 카베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같이 여행 온 일행이 암호를 해독해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주인은 여전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에 적힌 게 암호가 맞긴 해요. 애 아빠가 이런 장난을 참 좋아했지. 우리 가족끼리만 통하던 암호였는데……. 여기 적혀있는 건 ‘잊지마, 이걸 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에요. 아들이 물건을 참 잘 잃어버렸거든요. 우습게도 이 상자도 잃어버리고 엉엉 울었었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조차도 잊어버렸지만……. 아이들은 참 빨리 크고,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요…….”

“그럼…….”

“...일행 분이 암호 해독에 영 젬병이거나, 우리 가족의 암호가 너무 완벽했던 모양이네요.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가족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다시 되찾게 되었네요. 고마워요.”

“알하이탐이… 그런 실수를 할리가…”

 

그 때 암호 해독은 영 젬병인 건지, 가족의 완벽한 암호를 해독하지 못한 건지 모를 지론파의 서기관이 별장 앞으로 다가왔다. 아카데미아 졸업 당시에 이미 25개 국어를 하고 있던 한 천재가 별장 주인과 카베의 뒤에 섰다. 뛰어난 지략으로 신도 구하고 나라도 구한 남자가 주인의 손에 들린 상자와 얼굴이 잔뜩 붉어진 카베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결국 탄식하듯 말했다.

 

“실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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